[건축 없는 국가]
-한국의 건축계에 고하는 날 선 비평-
매서운 비평가, 이종건
얼마 전, 건축계를 들썩이게 했던 글이 있었다. 바로 이종건 교수의 생존주의 건축(가)라는 글이다. 필자는 그 글을 이종건 교수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한 젊은 부부 건축가의 SNS에서 처음 접했는데 내용이 매서우면서 날카로웠다. 그런데 그 아래의 덧글에는 젊은 건축가를 옹호하는 글과 푸념, 심지어 무시하라는 의견까지 있었다. 사태는 그 젊은 부부건축가가 자신이 참여한 책의 지면상에 반박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면서 더욱 달아오르는 듯 했지만, 이종건 교수는 이를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잡설’이라 규정하며, 다소 일방적으로 일단락되었다. 사실 이종건 교수는 ‘생존주의 건축(가)’라는 글 이외에도 조금은 과격하게 느낄 수 있는 언사를 자주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필자가 몇몇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서 느꼈던 그의 모습도 굉장히 공격적이고 날카로웠다. 거기다 매섭도록 진지한 눈빛과 작고 단단한 체구까지 더해져 흡사 ‘굶주린 파이터’를 보는 듯 했다. 이렇게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비평가가 우리나라 건축계를 향한 일침을 담은 ‘건축 없는 국가’를 내어놓았다. 건축이 없는 국가라니, 어떤 영문일까? 그의 생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건축자아 찾기
이종건 교수는 1장, ‘건축과 국가 그리고 존재’에서 우리나라 건축의 자아 찾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2012년 프리츠커상의 수상자인 왕수에 대한 프리츠커상 심사위원회의 변을 인용하며 왕수가 프리츠커상을 받은 것은 중국의 전통을 현재의 삶 속에 창조적으로 되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다. 모든 민족은 자신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그 시대의 삶이 빠져나간 단순한 박제품이 아니라, ‘오늘 여기’의 삶에 구체적으로 간섭하는 존재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 수준과 정도는 결국 민족과 문화집단의 문화적 수준과 능력에 직결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대부분이 역사를 무비판적으로 기념비로 삼거나 심지어 성물로 대하려 하는 태도를 우려하고 있었다. ‘역사의 핵심은 앞선 인간의 열망이 열어낸 세계의 가치와 의미’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너무 우러러 보지도, 너무 낮추어 보지도 않는 균형 잡힌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적인 건축’을 둘러싼 많은 노력들이 왜 가치 있는 담론을 생산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대면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중국과 북한은 공산주의 빨갱이기에, 일본은 우리를 침탈한 왜국이기에, 우리는 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 자신만을 바라본 나르시시즘에 빠졌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그는 우리 건축의 나르시시즘을 설명하며 한옥의 지붕선을 예로 들었는데, 위로 솟구친 중국의 지붕선과 거의 직선에 가까운 일본의 지붕선 사이에 위치한 한국 지붕선이 은근해서 중국과 일본에 비해 훨씬 더 자연과 조화롭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필자 역시 이러한 주장이 우리 것을 미화시키기 위해 비약적 논리를 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왔다. 자기합리화를 잘하는 사람은 발전하기 힘들뿐더러, 외골수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 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종건 교수는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 아키텍처란 무엇인가
이어 이종건 교수는 2장 ‘건축이라는 이름으로’에서 ‘건축’과 ‘아키텍처’의 의미를 구분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건축’이라는 단어와 서양에서 사용하는 ‘아키텍처’라는 단어는 단어 속에 담긴 의미가 다르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사용하고 있는 ‘아키텍처’는 변이/훼손된 언어라는 것이다. 아키텍처라는 말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고, 그렇기에 서양에서 의미하는 아키텍처라는 것의 본질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건축/아키텍처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건축/아키텍처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작업은 사상누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정의는 명확한 것이 아니기에 지속적인 반박과 질문과 논쟁을 함으로써 문화의 역동성과 탄력성과 개방성을 돕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그가, 서구가 말하는 아키텍처란 무엇인가? 그는 아키텍처를 문화의 차원의 것이라 말하며 문화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그 내용이 꽤나 흥미롭다. 한 부분을 옮기자면 ‘생존하기 위해 먹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요리를 만들어내고 부끄러움을 거리기 위해 입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패션디자인을 만들어내고, …(중략)… 몸을 움직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춤을 만들어 내는데, 그 모두가 바로 잉여욕망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잉여욕망의 생산물을 우리는 문화라 부른다. 문화는 잉여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단순히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 이상의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이다. 이종건 교수는 밸런타인의 말을 인용하여 건축이란 건물과 문화의 결합이며 아키텍처의 발달/전개과정을 설명해 주는 서사 즉, 시대를 관통하여 다음의 장으로 명확히 인도하는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어떤 건물을 아키텍처로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 건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라는 것을 환기시킨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다음의 장’이란 꼭 급진적인 변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테다.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이 되는 것처럼, 한발자국을 나아가더라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방향성을 가진 하나의 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작은 발자국이라도 유심히 바라보고 그 건물의 문화적 의미를 찾아(억지로 없는 것을 만들어내자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 점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종건 교수는 이렇게 아키텍처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이 비평과 토론이라 밝히며, 건강한 비평과 토론이란 감정에 치우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강한 나라이다. ‘하나의 허구적인 초대형 가족’과 같은 형태의 국가로 한 명이 대단한 일을 하면 나라 전체가 기뻐하고, 한 명이 탈선을 하면 외국에서 의아하게 바라볼 정도로 집단적인 죄책감을 갖는 나라라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피겨퀸 김연아의 경기에 대한 열광, 최근에 있었던 리퍼트 주한미국대사에 대한 테러 이 후, 전 국민적 죄책감 혹은 부끄러움. 극단적으로는 사죄집회와 석고대죄까지 하는 상황은 우리나라가 그러한 형태의 국가라는 사실을 명증한다. 이러한 국가개념은 분명 장점도 많지만, 이성이 아닌 감정이 앞서게 되면 그것이 어떠한 대상을 향할 때 폭력성을 띨 경향이 높다는 것이 이종건 교수의 우려이다. 참다운 주체자로 살기 위해서는 이미 주어진 의미를 끊임없이 심문함으로써 세계 내에 모종의 틈, 곧 주체자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데, 너무 감정에 치우치면 이성적인 열린 대화가 불가능하게 된다. 오늘날 아키텍처라는 놀이의 주인인 서구와의 문화전쟁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 것은 경제, 곧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점이라 그는 말한다.
건축 없는 국가와 국가 없는 건축
이러한 문화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종건 교수는 세 가지로 규정했다. 첫째, 아키텍처라는 문화놀이의 규칙을 지켜 그 놀이 공간 안에서 널리 주목받고 인정받는 길. 둘째, 아예 그 규칙을 깡그리 무시한 채 우리식의 건축놀이를 하는 것. 셋째, 그 둘 간의 모종의 접점을 찾거나 만들어 내어 그로써 우리와 그들을 동시에 포섭하는 길. 그리고 그 길을 김효만과 조민석이라는 두 명의 건축가를 통해서 설명한다. 3장 ‘건축 없는 국가’에서는 우리 전통에 중심을 두고 건축 작업을 하는 김효만의 건축에 대해 <몽유도원도>를 이용해 설명하는데 ‘비현실성:몽’, ‘자유로이 거닐기:유’, ‘물아일체:도’의 세가지 특징을 유의 공간으로 묶어서 이야기 한다. 풍경의 콜라주를 만드는 창과 자연을 담은 상자의 관입을 통해 비현실적인 공간을 느끼게 하고, 그러한 공간을 자유로이 거닐도록 하면서 내외부의 경계를 허물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효만의 작업은 현대건축이 안락을 위한 공간의 생산을 상실하고 기호/스펙터클로 전락한 상황에서 우리가 여전히 공간 문제를 붙들고 씨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로써 괄목할 수준의 건축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김효만은 이성과 감성, 합리와 비합리, 직선체계와 곡선/곡면 체계의 균형을 잡으며 그러해야할 근거를 마련하고 또 구축해내고 있다는 것을 높이 샀다. 특히 SANNA의 건축을 일본 전통문화에 근거해 설명한 퀸터의 글을 통해 비서구적인 문화적 전통에 뿌리를 둔 건축 작업이 충분히 급진적일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하지만 유의 공간의 가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비유와 표현이 많아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엔 조금은 아쉬운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명의 건축가인 조민석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그는 우리에게 이성적 민족주의가 절실함을 토로하며 문화 생산에 있어서 어디서 작업하고 활동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제대로 하느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느냐가 핵심이라 말한다. 그는 조민석은 대학졸업 후 14년간 외국에서 공부와 실무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건축가로서 ‘로컬’이라고도 할 수 없고, ‘글로벌’이라 할 수도 없는 중간자의 입장에서 국가와 문화에 얽매이지 않은 채 무언가 새로운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표현한다. 자본주의와 도시화로 인해 나타나고 있는 현대의 조건들의 틈새에서 건축에 대한 비판적 탐구를 지향점으로 삼은 조민석의 작업 중, 부티크모나코와 다음스페이스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주거방식과 새로운 보편공간(미스의 그것과 다른)에 대한 구현에서 건축가가 기존의 시장논리에는 어긋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시장의 힘과 논리로써 구현해내는 상황주도적인 건축작업이 우리사회에 절실히 요구된다고 외친다. 조민석은 이러한 건축가로서의 자신의 가치와 자본주의라는 시장의 논리, 어떻게 보면 이질적인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점은 이 시대를 사는 건축가에게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걸 시사한다.
매서운 눈빛 속 진지하고 따뜻한 시선
이종건교수는 맺음말에서 더 이상 중심부 주변부 구도가 없는 만국의 건축 시대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건축가들 간의 사유와 비평의 활성화가 중요하다는 말로써 맺음한다. 그러면서도 비평이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을 아쉬워하며 비평이 이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 글의 앞부분에 필자는 그를 ‘굶주린 파이터’라고 하였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우리나라의 건축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하나하나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날카로운 독설은 좀 더 잘 해라는 격려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우리네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그의 매서운 눈빛은 우리건축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고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상대방의 비평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대화에 응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이종건 교수는 정말 진지하고 열린 대화를 원하고 있다. 감정적인 대화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기 힘들뿐더러 서로가 지칠 수밖에 없다. 끓어오르는 감성에 차가운 이성을 더한 따뜻한 대화로써 한걸음씩 나아가는 우리 건축계가 되길 희망한다.
책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감히 우리나라와 우리 건축의 심장부를 뚫고 들어가 그 꼴과 모양을 더듬어 그려내고자 한다. 이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기도 한 탓에 더 욕심을 내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겠지만, 굳이 그러한 욕심을 품은 채 기어이 그로써 우리 건축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세울 방도를 모색해보려 한다.
우리 건축 사회에 속한 이들은 누구나 알고 느끼듯, 우리 건축의 문제는 늘 비평의 부재다. 비평 작업은 그리고 비평가로 사는 것은 고달프고 외로울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세상이 건축비평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더 이상 ‘비판성criticality’이 작동할 수 없는 사회가 아닌지 모르겠다. 비평의 공급이 아니라 비평의 수요를 말하는 것이다. 건축에 대한, 오늘날의 건축에 대한, 오늘날 우리 건축에 대한 좀 더 나은 안목과 인식과 지식이 분명히 요구되는 곳에서마저, 비평이 늘 요청/초대받지 못했다.
새롭게 펼치는 글 7
베니스 비엔날레 2014 14
1장 건축과 국가, 그리고 존재
1. 지역의 고유성 혹은 역사성 25
2. 존재의 중심과 확장 41
3. 인식의 나르시시즘 47
2장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4. 건축과 아키텍처 57
5. 아키텍처란 무엇인가? 73
6. 아키텍처와 국가 95
7. 건축과 아키텍처 간의 전쟁 119
3장 건축 없는 국가
1. 단서 139
2. 김효만의 건축 143
SANNA에 대한 퀸터의 글로부터 144
몽유도원도 149
‘유遊의 공간’의 의미와 가치 157
4장 국가 없는 건축
1. 단서 167
2. 조민석의 건축 171
부티크 모나코, 다른 거주 방식 173
DAUM 스페이스, 다른 보편 공간 182
화쟁和諍, 조민석 건축의 이질성의 원리 188
맺는 글 195
참고문헌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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